
경기(경쟁 프리젠테이션)에 반대하는 일반적, '이론적' 이유 외에도, 이제는 사적인 이유도 생겼다. 실현 가능성이 작은 프로젝트를 놓고 일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함을 깨달은 것이다. '상상의' 프로젝트를 작업 동기로 삼기는 어렵다. 빛을 보지 못할지도 모르는 작업을 그처럼 열심히 했다는 사실은 가슴이 아플 정도이다. 또한 세 디자인 팀이 프로젝트 하나를 놓고 일하는 것도 시간과 에너지 낭비 같다.
우리가 경기에 반대하는 다른 이유도 밝히는 편이 낫겠다.
첫째, 우리는 경기가 디자이너와 클라이언트의 건강한 관계를 형성해 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생각하는 건강한 관계란 이런 것이다. 클라이언트가 디자이너에게 시안을 의뢰한다. 일정 기간 작업 후 디자이너가 클라이언트에게 시안을 보여 준다. 클라이언트는 시안에 동의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동의하지 않으면, 클라이언트는 디자이너에게 그 이유를 설명할 거고, 디자이너는 왜 그 시안이 좋은지 설명할 것이다. 이런 토론을 거치면, 디자이너는 자신의 시안을 향상시킬 수 있다. 클라이언트와 디자이너 모두 이 논의에서 뭔가를 배운다. 그런데 경기를 하면, 이런 학습 과정이 생략된다. 클라이언트는, 마치 사탕 가게에 들어온 아이처럼 여러 디자인 중 하나를 고를 뿐이다. 학습, 발전, 진보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경기에 반대하는 두 번째 이유는, 경기가 반드시 가장 좋은 디자인으로 귀결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심사위원단의 역학 관계가 언제나 이성적인 것은 아니다. 위원회 상황에서 의사 결정은 종종 타협의 형태를 띤다. 예컨데 A위원이 1안을 가장 좋아하고, B위원이 2안을 가장 좋아한다고 치자. 그 경우 위원회는 타협안으로서 3안을 고른다. 그런데 3안은 가장 취약한 시안일 가능성이 크다.
- 익스페리멘털 제트셋의 인터뷰 중에서
외국 사람들의 이름에 유난히 난독증(?)이 있는 나로서는 반고흐가 반호흐로 읽히는 네덜란드 사람들의 이름이 쉴새없이 쏟아져 나오는 책이라 머리가 좀 아팠다.
러시아 사람들 이름이 나오는 소설하고 거의 엇비슷한 괴로움이었다고나 할까. ^^;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오래전 유럽 여행을 갔던 후배에게 부탁해서 어렵게 손에 쥔
유로화로 통합되기 전, 아름답기 그지없던 해바라기가 그려져있는 네덜란드 화폐를 기억 해 냈다.
그렇다. 네덜란드는 나라 자체가 어떻게 보면 '디자인'된 나라이어서
그들의 공공디자인 파워는 세계적으로 인정받을정도로 견고한 것이었다.
그렇게 네덜란드 디자인의 중심을 잡고 있던 우정국 내의 디자인팀이 없어진 것은 네덜란드 디자인계의 큰 충격이었다고 한다.
정현이가 암스테르담 거리를 걸으면서 저기 또 예술 작품이 있으시다고 얘기했던 부분에 대한 디자인계의 또 다른 자기성찰의 이야기도 언급이 되어 있다.
어쨌건, 현재의 위치와 앞으로의 방향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자들의 미래는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름들은 여전히 못외웠지만 소규모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각자 자기만의 디자인을 만들어가고 있는 수많은 디자이너들에게 화이팅을 외쳐본다.
우리 작업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은 극소수다.
우리는 그래픽 디자인 역사에서 극히 미미한 주석 정도에 불과하다.
우리가 계속 활동하는 이유는 단 하나이다. 여러 영향과 견해, 아이디어를 결합함으로써, 우리가 진정 우리만의 관점을 대표하게 되었다는 느낌이다. 타인의 관점과 다른 우리만의 관점. 만약 우리가 활동을 멈추면, 그 관점도 사라질 것이다. 몹시 슬픈 일이다. 그러니까 계속 작업할 수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
- 익스페리멘털 제트셋의 인터뷰 중에서





